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틴 루터 (문단 편집) === 개인적 일화들 === * 루터가 어릴 때는, 당시 학풍에 따라 닥치고 외우기 주입식 교육을 받았고 역시 그 당시 교육관에 따라 매를 많이 맞았다고 한다. 그 당시엔 펜과 종이가 매우 비쌌기 때문인데, 고교 과정까지는 [[라틴어]] 문법만 죽어라고 외우고 암기 검사하는 식의 교육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문법 공부만 미친 듯이하고 라틴어로 된 고전은 거의 읽지도 못했다고 한다[* 19세기까지도 유럽의 학교들에서는 학생들한테 라틴어 문법을 가르쳤는데, 이게 매우 어려워서 학생들은 라틴어 배우기를 질색했다. 이 시기를 묘사한 소설들을 보면 하나같이 학생들이 라틴어 배우기를 얼마나 싫어했는지가 잘 묘사된다.]. * 그리하여 훗날 교육을 논할 때 어린아이를 가르치려면 먼저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고 사랑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모든 소년 '''소녀들'''에게 [[성경]]교육 뿐만 아니라 그리스 로마 고전과 지리학 문학 등의 서적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는 도서관을 지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재능 있는 아이들을 뽑아다가 무료로 중등교육까지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공교육]] 개념을 처음으로 제안한 인물인 셈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일정 시기 동안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학]]에선 상징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사실 루터와 칼뱅 등 종교개혁가들도 [[문맹]]과 무지가 부패한 가톨릭 교리에 백성들이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원인이라는 것을 이미 간파한 상태였다.] 한편 동시대 인문주의자들은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여성교육에 대해선 매우 회의적이었는데, 여성의 지성에 한계가 있고 배워봤자 써먹을 곳이 없다는 이유로 여성교육은 '''노력의 낭비'''로 여겼다. * 그 당시 사람보다 여성에 대해 조금 높게 평가하긴 했지만, 루터는 여성사제는 반대했다. 성경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했다는 것이 그 근거. 오늘날 일부 [[루터교]] 교단에서 여성 사제를 인정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 * 루터가 성경 일부를 처음 본 건 대학에 진학하고서였고, 완전본을 처음 본 것은 [[수도자]]가 되고 강의하러 비텐베르크에 갔을 때였다. 13세기 [[발도파]][* 남프랑스 지역에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살자며 사유재산 폐지와 스스로 재산헌납과 빈민구제 목적으로 공동생활을 한 개혁 운동. [[이단]]으로 탄압받아 종교재판으로 수십만 많게는 100만 명이 척살된 후 산악지방에서 숨어 살다가, 종교개혁 시기 이후 개신교에서 원조 개신교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사냥 이후 평신도는 성서 보유와 열람이 금지되었으며, 하급 사제도 상급 사제의 허락을 맡아야 했다. 당시 [[인쇄술]] 혁명이 일어난 후에도 성서를 귀하게 보관한 건 가격이 비쌌기 때문인데, [[성경]]이나 법전처럼 매우 중요한 책은 아직도 필사본을 썼기 때문이다. 필사본은 [[양피지]]를 썼는데 [[양(동물)|양]]이나 [[염소]] 1마리에 고작 6~7페이지 분량이 나왔고, 최소 2천 페이지 성경책의 재료비는 당연히 높다. 더군다나 필사를 할 만한 인력은 당대 희귀한 고급인력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에, 부르는 게 값이었다. 따라서 1부씩 찍어 판매하는 게 아니라, 교회나 수도원 대학에서 선주문이 있어야만 착수하고, 수작업으로 소량 생산해내는 구조였다. 양피지 필사본은 쥐가 파먹을 걸 방지하기 위해 금고에 보관하는 게 보통이긴 했다. * 루터의 학업성적은 대학 초급과정까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57명 중 30등이었다. 하지만 석사과정을 마칠 때는 17명중 차석으로 졸업했다. 이건 루터가 에어푸르트 대학에 입학할 당시 동급생들에 비해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다. 아이제나흐 시절 [[라틴어]] 실력을 보고 학교를 방문한 후원자가 14세에 불과한 루터를 대학에 추천했고 루터의 아버지 한스의 욕심까지 더해서 겨우 3년 후 입학해서 그렇다고 한다. 철학석사 과정 때는 주과목 뿐만 아니라 당시 지식인들의 교양인 기하학, 음악, 수학, 천문학도 배웠다곤 한다. 특히 음악은 루터가 [[류트(악기)|류트]]라는 악기를 배워서 매우 즐겼고 루터는 음악을 매우 중요시 여겼기에 개신교 예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 루터는 철학석사를 마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위관료나 법관이 되기 위해 법대 박사과정으로 진학했는데, 철학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지만 억지로 보내진 곳이라 맺힌 게 많았던 것 같다. 훗날 아들 셋을 모아두고 '''법학 같은 개 쓰레기 학문은 아무데도 쓸데가 없으니 절대로 공부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했다. 그런데 장남은 법대에 진학하고 출세해서 할아버지의 원을 풀어 줬다. * 루터가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했을 때 신참 [[수도자]]는 예외 없이 탁발을 해야 했는데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항의가 들어왔다. 며칠 전까지 자기 대학 법대생이던 사람이 탁발을 하고 다니면, 대학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루터는 낮에는 눈에 띄지 않게 교외에서만, 시내는 밤에만 탁발을 해야 했다. * [[수도자]] 시절, 루터는 신부들의 기피 대상이었다. [[고해성사]]를 밥 먹듯이 하는데다가 한 번 붙잡히면 4시간 6시간씩 했기 때문. 다들 루터를 피해 도망 다니다가, 결국 주교대리 신부인 요한 폰 슈타우피츠가 고해신부를 맡았다. * 루터가 대학을 다닌 에어푸르트는 대학도시로 당시 인구가 3만이나 되는 대도시였다. 대학의 도시답게 음주가무와 사창가가 번성했는데, 루터는 [[우울증]]에 시달렸기 때문에 주색잡기엔 다행히 빠지진 않았다고 한다. 훗날 동창들 중에 루터의 반대자들이 인신공격을 많이 했지만 "돼지처럼 많이 처먹었다"는 비난밖에 못 들었다.[* 다만 이 부분은 원래 [[독일인]]들이 유럽에서 [[대식가]]로 유명한 민족이었다는 사실도 감안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15세기 독일로 파견된 로마 [[교황청]]의 특사는 교황청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독일인들을 가리켜 "그들은 [[돼지]]처럼 게걸스럽게 먹고 마신다."라고 조롱했고, 17세기 [[30년 전쟁]]이 벌어지던 무렵에도 독일인들은 그들 스스로 "우리는 1년 동안 번 모든 돈을 하루 동안 먹고 마시는데 다 쓴다."라고 자조적으로 말할 만큼, 많이 먹었다()] 훗날 루터는 에어푸르트가 타락했다며 소돔으로 전락한(?) 로마를 따라간다고 개탄(?)했다. * 루터가 에어푸르트를 욕한 것과 반대로 루터가 유명해지자, 루터가 초기학부와 석사를 마친 에어푸르트 대학과 신학대학과정과 교수직을 역임한 비텐베르크 대학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들 주장은 '''루터는 서로 내꺼'''라는 것. 비텐베르크는 인구 2천명에 소도시에 신흥 대학이었지만 선제후가 설립해서 밀어주는 대학이었고, 에어푸르트는 전통의 명문이라서 원래부터 경쟁 대학으로 감정이 있었는데, 루터를 가지고 서로 자기 동문이라고 싸우는 [[병림픽]]을 시전했다고 한다. * 루터의 성은 원래 앞서 한스 루더처럼 Luder였는데, Luther로 바뀐 이유에 대해선 말이 분분하지만, 일설로는 필명으로 쓰기엔 대체로 촌스러워서 바꿨다는 말이 있다.[* 이름을 바꾼 이유와는 별개로 이름의 의미는 엘레우테리우스(E'''l'''e'''uther'''ius)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엘레우테리우스는 디오니소스의 별명으로 그리스어로 '해방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속박에서 중세인들을 해방시킨 종교개혁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매우 적절한 이름인 셈이다.] 당시 학자들은 유럽 공용어였던 라틴어로 저작들을 발표했는데, 라틴어식에 가까운 루터로 개명했다는 것. 이름도 Martin인데 Martinus[* 마틴이라는 이름 자체는 원래 성인 마르티누스에서 온 것으로 세례명이다.]로 썼다고 한다. 이건 당연히 루터만이 해당되는 게 아니라,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는 초명인 헤이르트 헤이르츠(Geert Geerts)를 대신해 라틴어식 필명인 에라스뮈스를 고집했고, 루터를 심문한 토마스 카예탄 추기경도 본명은 톰마소 데비오(Tommaso De Vio)였지만 카예타누스(Cajetanus)라는 필명을 썼다고 한다. 장 칼뱅도 코뱅(Cauvin)에서 칼비누스(Calvinus)라는 라틴어 필명을 썼고, 인문주의에 영향을 받은 개신교 신학자들도 비슷하게 라틴어나 그리스어로 개명했는데 볼프강 카피토(Wolfgang Capito)는 본성이 쾨펠(Koepfel),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Johannes Oekolampadius)는 본성이 호이스겐(Heussgen)이었다. * 루터의 아버지 한스는 루터가 대학 기초과정을 졸업하자 아들을 더 이상 너(Du)로 부르지 않고, 당신(Sie)이라고 불렀다. 법대에 진학하기로 하자 100굴덴짜리 법전을 사주었다. (당시 하녀의 연수입이 1.5굴덴, 숙련공과 농부들의 연수입이 3~4굴덴이었다.) 사제가 되어 첫 [[미사]] 기념으로 잔치를 할 때는 재력을 과시할 겸 아들의 기를 세워주려고 일가친척, 친구 등 하객 20명이 탈 말을 대여해서 왔다. 직업 선택 관련 갈등에도 불구하고 한스 루더는 집안에서 처음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박사 아들을 많이 자랑스러워했고 아꼈으며, 루터 본인도 종종 어린 시절 집안 분위기를 애틋하게 추억했다. * 루터는 신학적으로 사도 바울의 연구를 많이 했고 존경했기에 세 아들의 이름을 모두 파울(Paul)로 지으려 했으나, 장남과 차남에겐 평범하게 아버지와 자신의 이름을 붙였고, 3남만 파울 이라 이름을 붙였다. * [[박사]][[학위]]는 루터가 유일하게 세속적인 지위에 집착한 것이다. 얼마를 주더라도 학위와는 바꾸지 않겠다고 자뻑했으며, 단촐한 묘비명에도 단 하나 박사만은 써넣었다. 물론 그 시절 진학률은커녕 식자율도 낮았고, 봉건적 질서에서 평민계급이 존중받을 수 있는 건 박사 학위가 유일했다. 학문적으로 신학 분야뿐만 아니라 고전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는 멜란히톤 등의 도움을 받아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원래 대학서 전공한 철학 공부량이 그의 성과의 밑바탕이었다. 에어푸르트 대학 시절 철학 교수진들은 스콜라 학파 쪽 교수와 인문주의학풍 교수들이 격렬한 학문적 논쟁을 이어 나갔기 때문에 루터도 이런 영향을 많이 받았다. 참고로 에어푸르트 신학부는 옛길(Via aitiqua)에 해당하는 스콜라 철학들이 포진한 방면 철학을 가르치는 교양학부는 새로운 길(Via moderna)를 지지하는 교수진들이 우세했다. 루터는 교양학부와 철학석사 과정 중에서 오컴 뿐만 아니라 새로운 길에 해당하는 여러 신학자들의 견해에 큰 영향을 받은 걸로 추정된다. * 훗날 [[스콜라 철학]]에 맹렬한 비판을 했지만 [[오컴의 윌리엄]]만은 인정했다. 오컴이 스콜라 철학자임에도 스콜라 철학을 무너뜨린 방법론을 제시했기에, 그를 가리켜 '나의 스승(Magister meum)'이라 부를 정도. 오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물론이다. (물론 1510년 경 이후 오컴의 윌리엄을 비롯한 후기 스콜라 철학도 극복하며 비판에 나섰다.) 한편 [[고대 로마]]의 [[키케로]]도 높이 평가했는데 영혼의 불멸을 주장했기 때문.[* [[가톨릭]] 세계관으로 서술한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에서도,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현인들은 지옥에서 가장 널널한 곳에서 편히 지낸다. 말이 지옥이지 아무런 고문 같은 건 없고, 단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해서 슬퍼(?)할 뿐 이라고.] * 1508년부터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강의를 맡았지만, 이는 전혀 자신이 원하던 바가 아니라 상사 슈타우피츠와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강권에 가까운 권유였다고 한다. 첫 강의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었는데 이때부터 비범하게 '''"이딴 건 쓰레기다!!"''' 라며 주목을 끌었고 학생들은 물론 교수들 사이에서도 격렬한 토론이 일어났다. 비텐베르크 대학교 신학부와 철학부는 아직 [[스콜라 철학]]에 해당하는 옛길(via antiqua) 노선이 우세했지만, 오랜 토론 끝에 결국엔 루터를 지지하는 새로운 길(via moderna) 학풍이 비텐베르크 대학교에 자리 잡았고, 기존 커리큘럼은 폐지되었다. * 비텐베르크 대학교는 신흥대학[* 당시 독일의 대학들은 14~5세기에 세워진 대학들이어서 비텐베르크 대학교는 루터의 종교개혁 당시 기준으로는 신흥 대학이 맞긴 했다.]으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사촌 친척인 작센 공작 게오르크의 영지인 마이센 변경백국에 있는 [[라이프치히 대학교]][* 15세기 초, 프리드리히 3세와 게오르크의 증조부인 [[베틴 가문]]의 초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작센)|프리드리히 1세]]가 [[후스 전쟁]] 당시 [[카를로바 대학교|프라하 대학교]]에서 쫓겨난 독일인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대학교다.]가 잘나가자 경쟁심에 세우게 되었는데 선제후가 직접 나서서 대학을 설립했지만 듣보 상태라 신입생 충원 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이 시기에 루터가 명강의(?)로 주목을 받자 학생들의 열렬한 반응이 나오면서 대학 흥행에(?) 성공하는데 선제후는 동생 [[요한(1468)|요한]]과 함께 루터의 강의를 청강하기도 했다고 한다. 내용에 대해선 전혀 공감하지 않았으나 스타 교수였기 때문에 내버려 두었다고... 대신 후임 선제후가 되는[* 프리드리히 3세는 서자만 남기고 적자를 남기지 못 했다.] 요한은 루터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 신앙적 이유를 들어 종교재판에 반대했다. 루터의 추종자나 가톨릭 지역에서 서로를 족치는 것과, 대조적으로 루터는 자신이 악마에 들렸다고 고백한 청년을 관대히 용서하고 같이 기도하자 권유했으며, 요하네스 테첼의 암살을 반대했고, [[이단]]들을 태워 죽이자는 주장에 "이단들 태울 장작불에 거위(Hus)나 구워 먹자"며 반대했다. 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핍박받은 [[존 위클리프]]와 아예 화형당한 [[얀 후스]]를 존경했던 루터는, 거위(후스)드립을 치며 그런 건 아무 소용없다고 반박한 것이다. (이는 [[얀 후스|후스]] 본인의 유언을 오마주한 것이기도 했다.) 영적인 투쟁은 세속적 수단인 폭력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성경)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루터파가 아직 초기 적이 많은 상황에서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과는 별도로 반대자에 대한 종교적 관용을 주장했기 때문인데, 루터의 반대자였던 칼슈타트나 토마스 뮌처, 아그리콜라 등은 스스로 나가거나 루터 지지자, 지역 군주에게 추방을 당했지 루터가 스스로 앞서서 누구를 죽이자고 주장한 적은 없었다.[* 역사학자 폴 존슨은 저서 <기독교의 역사>에서 가톨릭 지역에서 가장 탄압이 심했으며 신교도 지역은 덜했고, 칼뱅파 지역보다 루터파 지역이 종교적으로 가장 관대했다고 본다.] * 루터를 존경해 마지않는 작센 선제후 요한은 루터를 생각하여 직접 사냥해서 고기를 선물한 적이 있었는데, 루터는 냄새나서 싫다고[* 실제로 야생동물 고기에서는 [[누린내]]가 많이 난다.] 안 먹었다. 루터는 '''집에서 키운 돼지'''고기를 선호했다. * 루터는 동물 중에 개를 좋아했다. 먹이를 쳐다보는 개의 눈빛을 보고,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저런 집중력이 나와야 한다고 감탄했다. 꾀꼬리나 종달새처럼 좋은 소리를 내는 새들도 좋아했는데, 루터의 시종이 새 그물을 쳐서 수십 마리를 잡아서 보여주자 쓸데없는 짓을 했다. 다시는 하지 마라.고 나무라고 직접 풀어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 루터가 유명해지자 각지에서 그를 존경하는 인물들이 몰려들었고 추종자 집단도 생겨났다. 그래서 루터를 하루 종일 졸졸 따라다니면서 루터의 어록을 기록하는 이도 있었는데, 루터는 한때 우쭐해져서 내버려 두다가 이내 태도를 바꿔서, 메모하는 사람들에게서 종이를 빼앗아서 찢어버렸다. "이런 건 전혀 도움이 안 되네."라면서. 그럼에도 그의 어록들은 많이 남아서 <탁상 담화>라는 형태의 출판물이 전해지고 있다. * [[볼링]] 문서를 봐도 알겠지만 현대 볼링의 시초가 되는 인물이다. 실제로도 루터는 볼링광이었다고. * 루터를 평생 괴롭힌 것은 [[우울증]]이다. 어릴 때부터 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이로 인해 사제가 되고 신학에 몰두한 것. 우울증은 그를 죽을 때 까지 괴롭혔다. 다만 현대까지 루터를 폄하하는 근본주의 가톨릭계에선 악마에 사로잡혔거나 또는 그 이상의 정신질환자라고 주장했는데 [[https://ko.wikipedia.org/wiki/%EC%97%90%EB%A6%AD_%EC%97%90%EB%A6%AD%EC%8A%A8|정신분석학 권위자 에릭 H. 에릭손(Erik Homburger Erikson)]][* 심리학 등을 들으면 '''프로이트 다음으로''' 가장 처음 만나는 학자다.]의 저서 <청년 루터>에서의 분석을 보면 '''우울증을 겪은 건 틀림없지만, 그 이상의 중증 환자로 몰아가는 건 전혀 근거가 없다고 본다.''' * 루터는 [[독일인]]답게 [[맥주]][* 사실 이 시대의 [[맥주]]소비량은 현대 독일인들의 소비량보다 3배 정도 많았다.]를 즐겼으며, 평생 복통과 [[변비]]로 고통을 겪었다. 일설에 의하면 루터 자신의 "구원은 행동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주어진다"는 사상 또한 '''변기 위에 앉아서 힘을 주다가''' 불현듯 떠올랐다고. 술과 여자와 노래를 즐길 줄 모르면 바보라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근현대의 보수 [[개신교]] 교단에서 술을 금지하는 성향이 있지만, 정작 루터를 비롯한 초창기 종교개혁가들은 술 자체에 대해선 강하게 반대하지 않았다. 장 칼뱅 역시 본인은 포도주를 즐겼고, 술을 지나치게 마시지 않는 '절제'를 주장했을 뿐이다. * 루터는 말년 들어서 심장발작과 변비, 치질 그리고 극심한 결석에 시달렸다. 이미 중년기인 1520년대 후반기 무렵부터 요로결석을 만성질환으로 앓아왔었는데 1537년 2월 19일에 슈마르카르텐라는 마을에 머무르며 귀족들과 같이 회의를 하고 있을때 요로가 완전히 막혀서 6일 동안 소변을 보지 못했고, 이 때문에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를렀다.[* 요로결석 환자들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진통제가 없으면 죽여 달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그런데 이 병은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단지 고통이 끔찍하게 심할 뿐. 다만 의학시술이 발달되지 않던 루터 당대에는 죽음까지 불러올 수있는 심각한 질병이기는 했다. ] 귀족들은 루터가 심각한 상태에 빠지자 의사들을 데리고 와지만, 그 의사들은 최신 의술(?)에 따라 물을 많이 먹이고 그 부분을 빨아(?)내서 강제로 소변을 보게 하렸다. 그러나 루터는 차라리 고통에 시달리더다도 품위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낫다면서 고향에서 조용히 죽음을 준비하려고 했지만, 덜컹거리는 마차를 탔던 것이 효과를 보면서 시원하게 오줌을 놓는데 성공을 거두었고, 여관에서 결석이 무려 6개 이상이나 빠져나왔다고 한다. 이후로도 2주간 결석이 섞인 오줌을 누면서 만성적인 요로결석은 해결되었다고 한다. 루터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로는, 소변이 2시간에 걸쳐 4리터나 나왔다고 한다. * 루터의 가계는 장남과 차남이 아들을 남기지 못해서 3남 파울의 계보로 이어지다가 결국 남계는 단절되었다고 한다. [[http://www.luther.de/en/bora0.html|관련 자료]]. 막내딸의 후손들은 계속 이어졌다고 하지만, 루터 성을 쓰지 않기에 얼마나 퍼져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나마 알려진 게 나중에 [[독일 대통령]]이 되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그래도 루터 성을 쓰는 사람들은 수천 명 남아있긴 한데, 루터의 친척이나 형제와 조카들의 후손들이다. * 종교개혁 중 가톨릭의 박해에 의해 좌절하던 루터에게 아내인 카타리나 폰 보라가 한마디 했다는 일화가 있다. 카타리나는 한참 좌절에 빠진 루터의 곁에서 상복을 입고 한껏 슬퍼하다가, 루터가 "누가 죽었냐"고 물으니 "하나님께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에 격분한 루터가 온갖 교리적인 설명으로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다"고 하니, 카타리나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데 어찌 당신은 좌절에 빠져 계시냐"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